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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제국주의자들 이야기

by 고미구구 2019. 10. 12.

제국주의 시대는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불과 반세기만에 유럽 일부 열강이 태평양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대부분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 기술을 통해 저개발 지역 주민들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승리와 정복의 소식으로 점철된 가슴 두근거리는 시기였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제국주의의 사악함과 그 필연적 몰락을 설명하는 저술들로 넘쳐나고 있다. 유럽의 지배권은 소멸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제국주의에는 추악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저개발 지역을 인류 공동체에 진입시키기 위한 불가결한 준비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영국은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으며 식민지 행정관으로서의 오류와 미덕을 동시에 지녔다. 저명한 영국 문제 평론가인 모리스는 다음 글에서 스탠리와 로즈에서 재키 피셔에 이르기까지 기라성같은 제국 건설자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동정심이 결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신 그들에게는 충만한 용기와 투철한 신념, 그리고 권위주의적 기질이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식 - 1897년 6월 22일 이날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경축일이었다. 여왕의 각료들은 영국을 둘러싼 세계 정세를 돌아보고 여왕 폐하의 역사적 위치를 심사숙고하면서 이날을 제국의 축제일로 정했다. 

 그것은 제국의 유례없는 성공적 통치를 상징하는 중대 행사였다. 물론 영국은 디즈레일리가 비판한 것처럼 아직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슬럼가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뒷골목에서는 폭력이 난무했으며 산업도시들의 상태는 가히 악마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동시에 대단히 쾌적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는 기분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다. 지구상에 있는 육지 면적의 약 4분의 1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최초로 시작했으며 탁월한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 영국은 부와 힘그리고 혈통을 전 세계에 떨치고 있었다. 잃어버린 아메리카 식민지는 오래전에 다른 영토로 대치되었다. 아시아의 절반, 아프리카의 절반, 북아메리카의 절반, 오스트레일리아 전부, 전 세계에 산재된 섬과 숲과 급탄기지, 이 모든 곳은 지도에 붉은색으로 표시되었고 영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어주었다.

 이런 현상이 일종의 역사적 부풀리기 라는 것을 간파한 현자들도 있었다. 영국은 이렇다 할 자연 자원 없이 영악하게 처신한 인구 과밀의 섬나라였다. 영국을 일류 국가로 만들어준 주변 환경은 결코 영속할 수 없는 것이었고 모든 상황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정상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일시적이나마 세력의 절정에 도달했다. 신제국주의라는 종잡을 수 없는 신조는 선거에서 보수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담보해주었고 엘가와 키플링 같은 사람들은 제국의 깃발에 환호했다.

 영제국은 거대한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일단 영국 여왕의 함대와 육군이 지구 먼 곳의 한 지역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은 다른 경제 시장, 다른 전략적 배후지, 다른 그리스도교 선교지역 호가보를 압박했고 필연적으로 또 다른 먼 지역의 획득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낙원의 개념을 정의하라는 요청에 계관시인 오스틴이 던진답변은 영국 신민들의 견해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스틴에 의하면 "정원에 앉아 육지와 바다에서 영국군의 승전 소식을 듣는 것" 그것이 낙원이었다.

 영국인의 정서 가운데에는 필연적으로 오만과 편협, 그리고 저열한 주전론이 있었지만 그래도 영제국 역사에서 이 시기는 비교적 온건한 시점이었다. 제국의 성공이 영국인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만들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들의 허장성세의 배후에는 유머와 관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명정대 같은 온건한 국민성이 잠재해 있었다. 영국의 가장 위엄있는 숙녀인 여왕 자신이 이러한 소박한 기질을 완벽하게 드러냈다. 즉위 60주년 기념식을 치르던 날 아침에 국수주의적인 나팔을 불어대지 않은 것, 신민의 허세에 영합하려 하지 않은 것은 눈여겨볼한 한 일이다. 여왕은 1천 3백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영제국 영토에 거주하는 4억 1천만 신민들에게 연설했다. 그러나 여왕이 한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진심으로 나의 신민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같은 모습의 영국인들 - 키플링이 처음 인도를 떠나 동쪽으로 갔을 떄 그는 라호르와 캘커타의 악취는 서로 비스했던 데 반해 미얀마의 악취는 사뭇 달랐다고 말했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어마어마한 에머닞와 일본인들의 놀라운 활력에 충격을 받았으나 동방의 제국 어느 곳을 가도 영국인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싱가포르의 식물원 바라크 건물에서 열렸던 파티를 두고 이렇게 빈정거렸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고귀한 자아였다. 홀 가운데는 고혹적으로 예법을 따르는 아리따운 금발 아가씨, 모두에게 자신만만하게 말을 건네는 통통한 꼬마 아가씨, 본국에서 이제 막 도착한 노처녀, 그리고 밝은 색 코트에 폭스테리어를 동반한 당당하게 잘 차려입은 초급 장교가 있었다. 벤치에는 뚱뚱한 대령, 거구의 재판관, 기술자 부인, 상인들과 그 가족들이 직종별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을 만났다. 낯설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으므로 마치 오래된 친구들인 것처럼 인사를 했다.

 물론 누구도 그처럼 전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초급 장교는 아마 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을 것이고 노처녀는 광둥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것이며 상인들은 아마 제 7안식일 재림파 신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포마드를 바르고 파라솔을 받쳐 든 전형적인 신사이건, 전선에 배치된 용감한 병사이건 간에, 낯선 사람이 볼 때 제국 내에서의 영국인은 매우 비슷한 모습이었다. 빅토리아조 후기의 영국인은 영국적 특징이 매우 강했고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영국인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대개 그들은 다른 유럽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격이 크고 건장했다. 19세기 영국의 번영은 빈민 계급 마저 그렇게 만들었다. 수백 년 간에 걸친 성공은 신사 계급을 튼실하게 살찌웠다. 영국 신사의 큰키와 꼿꼿한 자세는 옛 군대 사진을 보면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솔즈베리 내각 구성원 중 다섯 명은 키가 6피트 이상이었고 솔즈베리 자신은 6피트 4인치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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