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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원인

by 고미구구 2019. 10. 12.

사라예보의 총성 -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도리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하며, 세르비아 정부가 이 음모에 은밀히 관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답변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스틸먼은 발칸 반도 및 중동 문제 전문가로서 이러한 사실 관계 구명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건 이후 발발한 가공할 문제들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과학 문학 예술 면에서 많은 중요한 변화가 있었고 민중의 생활 수준도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던 전쟁 직전 유럽인들의 장밋빛 전망과 기대를 회상한다. 그리고 전쟁 기간에 행해진 대학살이 물질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고 파괴해버렸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4년 동안 행해진 대학살의 결과,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를 특징짓는 잔인한 폭력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사라에보에서 터졌다. 오전 11시 정각이 되기 불과 몇 분 전, 프린치프 라는 청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를 암살함으로써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사라예보는 여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실망스럽고 다소 불안한 경험이다. 어둡고 황량한 구릉지대에 둘러싸인 이 회색의 발칸 도시는 엄청난 비극의 무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유혈과 고통은 오래전부터 발칸 반도에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지극히 초라하고 가난한 도시인 사라예보에서 한 시대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단 말인가? 그다지 두드러진 인물도 아닌 페르디난트 대공과 평민 출신 부인의 암살이 어떻게 세계대전을 촉발했는가? 그 사건이 있기 전 사반세기 동안 그보다 더 비중이 큰 수많은 전쟁의 계기와 빌미가 제공되지 않았던가? 오늘날 어느 누구도 그 사건을 명료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그 사건의 세부적인 내막은 그 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ㅣ나자 망각의 늪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의 여행자들은 사라예보를 방문하고서도 프린치프가 그날 아침 서 있던 그 장소를 거의 찾지 않는다. 사건이 벌어진 강둑 옆에는 어둡고 작은 박물관 하나가 자유를 위한 거사를 도모했던 소년 일곱 명의 삶과 열정을 기념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색 바랜 사진 몇 장 음모자들의 초라한 유물 몇 점, 그리고 파리똥 묻은 방명록이 펼쳐져 있다. 초라한 차림의 안내원은 전시된 기념물들 때문에 행여 정치적 열기가 야기되지나 않을까 경계하고 있는데 그런 태도는 오늘날과 같은 냉소적인 시대에는 고지식하게 보인다. 비명에는 "여기 이 역사적 장소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자유를 출발시켰다. 1914년 6월 28일 성비투스의 날"이라고 써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라예보 방문객 중 그것을 읽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사실 관계는 제법 알려져 있다. 쇠락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모험을 즐기는 츃ㅇ 떄문에 투르크로부터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를 탈취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인종 불균형을 악화시켰다. 제국 내의 남슬라브 족은 핍박을 느끼고 점차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야심적인 소왕국 세르비아는 발칸 지역의 헤게모니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붕괴 직전 단계의 재정 러시아는 피보호국인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남부를 전복할 모의를 꾸미고 있엇다.

 그러나 설명되어야 할 것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연로안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어떻게 해서 계승자가 되었는가? 황태자였던 루돌프 대공은 1889년 1월 30일 마이얼링에서 17세 소녀와 함께 권총 자살을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삼촌으로서 나폴레옹 3세의 볼모였던 막시밀리안은 잠시 멕시코 황제 자리에 있다가 혁명군에게 총살당했다.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부친카를 루트비히 대공은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요르단강에서 물을 잘못 먹고 죽었다는데 이는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새로운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어떻게 제국에 닥친 위험을 감지했으며, 어떻게 그의 신민이 될 슬라브족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허용하는 정책을 제시했는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어떻게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검은손이라 불리는 맹목적 애국주의자들의 비밀 결사는 어떻게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모의했는가? 이 거사에 어떻게 일곱 명의 소년들이 동원되었으며 왜 가브릴리오 프린치프가 뽑혀 1914년 6월 28일 오전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코테크를 저격하게 되었는가? 그 후 어째서 어리석게도 전쟁이 터졌는가? 적개심이 분출되자 서투른 외교와 무모한 계획은 어떻게 재난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는가?

 이 모든 일의 전개 과정은 대단히 기이하다. 이렇다 할 적절한 원인 없이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1914~1918년의 지옥같은 전쟁이 마침내 끝나자 비탄에 잠긴 생존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 가공할 사태를 이해하고자 했다. 아무런 대의 명분도 없이 지옥 같은 전쟁을 겪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에 대한 섬뜩하고 엄청난 희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열하거나 사악한 동기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했다. 전쟁이 끝난 후 처칠은 이렇게 술회했다.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물질적 번영에 만족하지 못한 각국은 끊임없이 안팎에서 투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치 온 세계가 고통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만일 이 견해가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이 전쟁은 끔찍한 인간 본성에 대한 하나의 심판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신화가 형성되었다. 군수품 제조업자들이 전쟁 음모를 꾸몄다, 마키아벨리즘적, 제국주의적 외교 떄문이다. 점점 치열해진 군비 경쟁 때문이다 등의 신화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어떠한 단일한 원인 또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원인들도 1차 세계대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그 어느 나라도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통한 경제적 지배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수백 년 동안 큰 전쟁 없이 사회혁명과 기술 혁신에 몰입하던 서양의 문명이 역설적이게도 대량 학살로 치달았다는 것, 우울하지만 그것이 이 전쟁의 진실이다. 

 참혹한 전쟁 - 밝혀진 범위 안에서 판단하자면 전쟁 당사자인 양측의 실제 목적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고작해야 세르비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애도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 개인의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 향후 7백만 명의 희생을 치르고 국가 조직을 파멸로 이끌 전쟁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은 노쇠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가난에 찌든 서부 발칸 지역에서 불안정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무려 9백만 이상의 전사자, 부상자, 포로를 냈다. 독일은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이미 공포된 동원령을 철회한다는 공공연한 굴욕과 우려를 피하기 위해 2백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알자스로렌,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 그리고 중부 유럽과 중동에서의 점증하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영국은 벨기에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8백만 명을 전쟁터에 보내 1백만 명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에 반격을 가하고 1870년에 받아들였던 강화조약에 보복한다는 명분 아래 전체 인구의 15%를 잃었고 그 후 상당 기간 정치적 쇠퇴를 겪었다.

 이것이 1차 세계대ㅓㄴ으로 치른 희생이었다. 두 발의 총성이 사라예보에서 울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세계의 절반이 피를 흘렸다. 적어도 1천만 명의 병사들이 죽었고, 2천만 명이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수치가 전쟁의 전부는 아니다. 전쟁이 남겨준 진정한 유산은 절망, 혼돈, 정치적 야만주의 등 무형적인 것이었다.

 19194년 여름 유럽 각국의 군대는 장식 단추를 단 저고리와 붉은 색 주아브 바지를 걸치고 도금한 헬멧을 쓴 채 아마겟돈을 향해 진군했다. 5개월 후 그들은 진흙밭에 쭈그리고 앉아 이에 물리고 굶주린 채 추위에 떨며 처참한 비인간적 상황에 몸서리쳤다. 프랑스 작가 셀린은 훗날 이 전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2백만 광인들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간 그들 모두는 영웅이었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도 없이 빈틈없는 무장을 했다! 그들은 저격, 제도, 비행 포복, 참호 파기, 은폐, 차량 수송, 폭파 작업 등을 하면서 정신병원 같은 토굴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독일과 프랑스, 전 세계의 모든 것, 모든 숨쉬는 존재를 파멸시키려 했다. 그들은 미친 개보다도 더 잔인했고 자신들의 광기를 숭배했다. 1천 마리의 개보다도 백배 천배 더 흉포했고끝없이 사악했다. 나는 마치 내가 십자군에라도 나선 것만 같았다. 그것은 묵시록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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