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뉴턴이야기

by 고미구구 2019. 9. 28.

 

그는 사상의 낯선 바다를 홀로 항해했다.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뉴턴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시인에게 아이작 뉴턴은 프리즘과 고요한 표정을 간직한 인물로 비쳐졌다. 그러나 뉴턴의 차분한 얼굴에 자리 잡은 두 눈은 실제로는 앞으로 튀어나온데다가 흐리터분하기까지 해서 그다지 이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성적인 사람이 매양 그러하듯이 애매한 표현을 하곤 했다. 이것은 그가 고독을 즐기거나 세상을 경멸해서가 아니었다. 뉴턴은 온갖 사람과 사건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언짢을 때면 수학적인 하찮은 일에대해 혐오감을 드러내곤했다. 그는 종종 신경질을 부렸고 거의 언제나 우울한 상태였다. 그의 친구의 말에 의하면 뉴턴은 딱 한 번 웃은 적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대체 유클리드 기하학이 살아가는 데 무슨 쓸모가 있는 겁니까?하고 묻자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뉴턴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그는 언제나 매우 짧게 대답했다. 심지어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는 경우에도 그러했다. 이는 자신의 엄격한 이상을 충실히 따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의 이상은 수학적 정확성으로 그것은 수학자들이 가장 간결한 증명에서 발견하는 미학적 특성이기도 했다. 뉴턴은 이러한 형식적 엄격성을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안에 녹여냈다. 과학자로서 생애의 절정기에 그는 역학 전체를 세 개의 간결한 운동법칙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말년에 접어들어 그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최소한의 본질적 명제들로 압축시켰다.

 그는 언제나 말수가 적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필요이상으로 증명 단계를 늘리는 것처럼 세련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어떻게 그 많은 발견을 해냈느냐고 뉴턴에게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답했다.

 

 언제나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논박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점차 빛이 떠오를 떄까지 며칠이고 한 문제에 놀랍도록 정신력을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떠오른 빛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이 됐다. 뉴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실제로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만약 뉴턴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과학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이 이룩한 광대한 업적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우리는 사전적 정의를 통해 그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잘 알 수 있다. 뉴턴이 살아있던 시기에 이른바 근대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뉴턴 철학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뉴턴이라는 한 개인의 이론으로 여겨졌고 사실 상다 부분 그러했다. 물론 그는 과학을 발견해내지는 못했다. 그 누구도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 과학은 활용되기를 기다리는 간단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전혀 공통점이 없는 수많은 요소들을 집대성한 복잡한 고안물이다.

 물리학은 난해하고 복합적인 하나의 실체이다. 예컨대 그것은 물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 수학의 추상 개념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수학적 의미를 가지 않는 수학의 추상개념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수학적 형태를 갖지 않는 비근한 물리적 현상을 결합한다. 물리학은 회의적이고 엄밀한 실험 방법을 적용하기도 하지만 그 방법을 실체의 기게적 본성에 대한 지극히 포괄적인 가설과 결합하기도 한다. 물리학은 경험적 학문으로서 진리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드러난다고 간주한다. 또한 물리학은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학문으로서 사물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추정한다. 이렇듯 상반된 요소들을 결합하고 종합해낸 것, 그것이 바로 뉴턴이 한일이었다. 근대 과학과 그 과학적 방법을 기계에 비유한다면 뉴턴은 기게 부품을 조립하여 그것이 지닌 가공할 힘을 증명한 것이다. 뉴턴은 위대한 천재였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재치있게 표현해쓷ㅅ이 그는 매우 알맞은 시기에 태어났다.

 

분열된 과학 - 뉴턴이 태어난 1642년경 과학혁명을 주도한 위대한 민물 중 네명이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고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철저히 분열되어 있었다. 지동설을 설파한 코페르니쿠스는 그 무렵 이미 죽은 지 1백 년이 되었다. 베이컨은 1626년에 케플러는 1630년에 그리고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던 해에 죽었다. 그들의 뒤를 이은 다섯 번째 위대한 인물인 데카르트는 이미 방법서설을 출간했고 뉴턴이 태어난 지 2년 후인 1644년에는 철학의 기계적 원리에 대한 기념비적 논저를 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과학의 방법과 목적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위대한 선구자들의 공통분모는 과학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혐오와 그것을 무언가 더 나은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는 압도적인 갈망 뿐이었다. 그 당시의 어법대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낡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결속한 새로운 철학자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이 선구자들은 폭넓은 결속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내부적 불일치는 예리하고도 깊었다. 케플러의 동료이자 친구인 갈릴레오는 케플러의 기본 개념을 철저히 경멸했다. 케플러는 특유의 대담성으로 태양에서 바퀴살같이 뻗어 나오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 행성들을 궤도에 잡아두며 지구와 동반자인 달 사이의 상호인력을 이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불변의 천체마저도 그 움직임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자연적 힘을 필요로 한다는 이와 같은 급진적 개념은 케플러의 천문학적 업적의 근가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케플러 같은 명민한 인물이 달이 물을 지배한다는 식의 마술적 신비주의나 유치한 관념에 귀가 솔깃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은 공연한 험담이 아니었다. 갈릴레오의 이런 혐오감은 새로운 철학에 대한 그 나름의 독자적인 심오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갈릴레오에게 철학이란 태양에서 방사된 신비한 힘따위의 온갖 마술적 설명을 배제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갈릴레오의 견해에 의하면 철학자의 임무는 사물의 감춰진 원인을 기발하게 꾸며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간단명료하게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를 연구함으로써 낙하하는 물체가 등가속도운동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그는 왜 물체가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낙하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활동한 데카르트는 이들 두 학자와 견해를 달리했다. 갈릴레오가 그러했듯이 보이지 않는 힘과 마술적 원인이 철학헤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데카르트가 가졌던 근본 신념 중 하나였다. 세계는 정신과는 별개로 오직 물질적인 실체만으로 이루어지며 이 물질은 전충성이라는 특성만을 갖는다. 예컨대 어떤 물질도 색채를 갖지 않는다. 특정한 물리적 구조 때문에 띠는 특정 색채를 그것의 고유한 색이라고 간주하는 주관적 감각이 있을 뿐이다. 두 사물사이의 고유한 색이라고 간주하는 주관적 감각이 있을 뿐이다. 두 사물사이의 유일하고 참된 차이는 물질을 구성하는 작은 입자들의 크기 모양 배열 운동의 차이다.

댓글